로미오를 사랑한 줄리엣은 중2병 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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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776회 작성일 14-07-27 23:13본문
줄리엣은 ‘중2병’이었을까?

로미오와 사랑에 빠질 때, 줄리엣의 나이는 열 네 살이었다. 우리 기준으로는 중학교 2학년인 셈이다. <제공: 네이버 영화>영화 정보 보러가기
로미오와 사랑에 빠질 때, 줄리엣의 나이는 열 네 살이었다. 우리 기준으로는 중학교 2학년인 셈이다. 로미오가 몇 살인지 정확하지 않다. 그래도 맥락을 짚어보면 아마도 그 또한 ‘십대 청소년’인 듯싶다. 로미오와 줄리엣, 어린 연인의 사랑은 불 같았다. 부모도, 미래도, 사랑을 위해서는 모두 던져버릴 기세였다.
만약 줄리엣이 이 땅의 대한민국 청소년이라면 어떨까? 그대가 만약 줄리엣의 ‘담임교사’라고 생각해보라. 등골이 오싹할지도 모르겠다. 줄리엣의 모습을 꼼꼼히 뜯어보면, ‘중2병’의 특징이 오롯이 드러나는 탓이다. 중2병은 나라님도 못 고치며, 김정은도 중학교 2학년이 무서워서 남침을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중2병은 질풍노도, 안하무인, 후안무치의 절정을 보여준다.
줄리엣은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본다. 로미오 집안이 자기네와 원수라고? 무슨 문제란 말인가? 로미오와 결혼을 하면 두 가문은 화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연인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은 하늘을 찌른다. 이 뿐 아니다. 줄리엣은 열렬한 감정을 억누르려고도, 추스르려고도 하지 않는다. 줄리엣은 이 땅에 흔한 중2 학생들과 다르지 않다. 늘 감정이 먼저고 머리는 나중이다. 줄리엣들의 부모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줄리엣의 중2병은 독약을 먹는 장면에서 정점을 찍는다. 이틀 동안 시체처럼 잠만 자게 되고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는, 말 그대로 ‘독약’이다. 그럼에도 줄리엣은 거침없이 이를 받아 삼킨다. 마치 오토바이 폭주족을 해도, 자신만은 죽지 않을 거라 굳게 믿는 비행청소년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여전히 아름답고 감동 깊게 다가온다. 왜 그럴까? 중2병은 스쳐 지나가는 열병인 까닭이다. 영혼이 자라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겪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세월이 흐르면 중2병은 부끄럽지만 풋풋했던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중2병 한복판에서 있는 당사자에게 이런 말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을 테다. 되레 ‘속 터지는 소리’로 다가올지 모르겠다. 이들과 씨름해야 할 부모와 선생님들은 더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2병 시기를 현명하게 넘길 수 있을까?
인간을 키우는 것은 ‘허세’다
중2병에 대한 처방전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에게서 찾을 수 있을 듯싶다. [국부론(國富論)]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주장한, ‘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 말이다. 그는 철학책도 여러 권 썼다. 지금 소개할 [도덕 감정론]도 그 가운데 하나다.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은가?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출처: gettyimages>
애덤 스미스는 ‘허세(vanity)’를 나무라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를 키우는 것은 허세이기 때문이다. 왜 돈을 많이 벌고 싶은가? 명예와 권력을 움켜쥐고 싶은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먹고 사는 정도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인정과 사랑이 필요하다. 그런데 세상은 부와 권력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하고 우러르는 법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둘을 손에 넣기 위해 아등바등 한다. 이 둘을 가지면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애덤 스미스는, 인성과 인격은 돈과 명예, 권력을 좇는 가운데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재산에 이르는 길(road to fortune)’과 ‘덕에 이르는 길(road to virtue)’은 다르지 않다. 재산을 모으려면 성실하고 절약해야 한다. 약속도 잘 지키고 정직해야 남들이 믿고 일을 맡기는 법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재산을 불리는 가운데서, 세상살이에 필요한 도덕성을 갖추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상업이 커나갈수록 세상에는 신중함, 정의로움, 절제 같은 미덕이 자리를 잡게 된다고 주장한다.
공감 – 세상살이를 이끄는 힘
애덤 스미스는 한 발 더 깊게 파고든다. 돈에 매달리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올까? 정직과 성실, 절제 같은 덕을 갖추어야겠다는 조바심은 어디서 오는가? 애덤 스미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인간의 능력을 눈여겨본다. 이른바 ‘공감(sympathy)’ 능력이다.

돈에 매달리는 마음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출처: gettyimages>
인간은 항상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평가한다. 부자를 부러워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 있을까? 공감을 통해 그가 누릴 풍성함과 여유를 상상을 통해 느끼는 데 있다. 가난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또한 상상을 통해 힘든 이들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는 탓이다.
이처럼 인간은 공감을 나침반 삼아 세상을 헤쳐 나간다. 남들이 바람직하게 볼만한 것을 좇고, 눈 흘길 모습은 애써 피하는 식이다. 또한, 사람들은 남들의 마음을 사려고 애를 쓴다. 남들의 공감을 살 수 없을 때는 죽을 만큼 괴롭다. 예컨대, 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도 아무도 축하를 안 해준다고 해보라. 기분이 어떻겠는가? 내가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데도 아무도 위로를 안 해 준다면? 잘난 척 하지 않고 주변에 마음 쓰며 인격을 갖추려는 데는 이렇듯 공감 능력이 큰 역할을 한다.
‘여린 사람’과 ‘현명한 사람’

여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린다.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늘 고민한다는 뜻이다. <출처: gettyimages>
공감에도 수준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여린 사람(weak man)’과 ‘현명한 사람(wise man)’을 나눈다. 이 잣대로 보면 중2병에 빠진 아이들은 ‘여린 사람’일 듯싶다. 여린 사람은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린다. 친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늘 고민한다는 뜻이다. “찌질해 보이느니 죽는 게 낫다.”고 대놓고 말하는 아이도 있을 정도다. 주변에 얕보일까봐 잔뜩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선생님에게 반항하며 강한 척하고, 도움을 주려는 어른들에게도 험한 소리를 한다. 뭔가 세상과 다른 특별한 부류인 듯 심각한 표정을 짓고 어려운 소리를 늘어놓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 이래도 될까하는 불안감도 있지만 애써 감춘다. 주변 친구들이 자기를 한심하게 볼까봐 두려워서다.
현명한 사람도 주변의 시선에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 범위와 폭은 한참 더 넓고 깊다. 여러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볼 줄 안다는 뜻이다. 부모님과 가족, 선생님, 선배와 후배, 친한 친구와 안 친한 친구, 이 다음에 어른이 되어 자신의 중학생 시절을 떠올리고 있을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에서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애쓴다.
애덤 스미스는 이 가운데서 마음속에 ‘공평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자리 잡게 된다고 말한다. 공평한 관찰자는 ‘양심의 소리’와도 통할 듯싶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쓰레기를 버렸다 해보자. 주변에 자신을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공평한 관찰자가 영혼에 심어진 사람은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다. 공평한 관찰자가 비난을 보내는 탓이다. 반면, 남을 돕기 위해 엄청난 손해를 무릅쓴 경우는 어떨까? 누구 하나 칭찬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기분이 좋다. 공평한 관찰자가 칭찬과 격려를 해주기 때문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공평한 관찰자가 마음에 자리 잡는다는 뜻 아닐까? 성숙한 사람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 삶과 세상에 대한 의무감(sense of duty)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다. 마음속 공평한 관찰자의 칭찬과 비난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의 역할을 한다. 누가 나서서 추켜세우거나 야단치지 않아도 스스로 인격을 갈고 닦게 된다는 뜻이다.
줄리엣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독을 마시고 잠든 줄리엣. 줄리엣의 비극을 이 땅의 청소년들이 반복하게 해서는 안된다. <출처: wikipedia>
다시 ‘중2병’으로 돌아와 보자. 학자들은 청소년기의 특징으로 ‘상상의 관중’을 꼽곤 한다. 이는 자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세상의 모든 이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을 말한다. 그래서 사춘기 아이들은 다른 이들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하다.
이런 모습은 인격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출지 생각하고, 진짜 그런지를 친구나 부모,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눈다. 이 가운데 잘못 생각한 부분은 깨우치고 받아들여야 할 측면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공평한 관찰자는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떤가? 요새 아이들은 정말 시간이 없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으니/ 넌 우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질 거야/ 그럴 때마다/ 네가 계획한 공부는/ 하루하루 뒤로 밀리겠지/ 근데 어쩌지?/ 수능 날짜는 뒤로 밀리지 않아/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
어느 학원에서 버스 광고판에 크게 실은 카피 문구다. 왜 지금 아이들이 부모세대보다 사춘기를 더 심하게 앓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자신과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할 능력이 생길 때, 중2병은 치유되어 사라진다. 이러기 위해서는 숱한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꾸준한 반성이 필요하다.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면서, 어떤 점이 칭찬받았고 무엇 때문에 비난을 샀는지를 떠올리며 인격을 가다듬게 된다는 뜻이다.
경쟁에 쫓기는 고립된 영혼들은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어렵다. 사회는 상처를 심하게 받은 아이들이 영혼이 건강한 친구를 만나는 일을 두렵게 만들기까지 한다. ‘경쟁 제일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은 이마저도 자신을 ‘인격에서도 열등한 패배자’로 낙인 찍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 답답하고 또 답답한 노릇이다.
열 네 살의 사랑에 빠진 줄리엣은 ‘중2병’의 희생자라 할만하다. 그녀의 영혼에 ‘공평한 관찰자’가 자리를 잡았다면, 로미오와 오래도록 아름다운 사랑을 꾸려나갔을지도 모른다. 줄리엣의 비극을 이 땅의 청소년들이 반복하게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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