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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무리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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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ky 댓글 0건 조회 10,541회 작성일 14-03-24 22:57

본문

 
레무리아 사회가 과연 어땠는지 느껴보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레무리아 사회에서, 아이들은 영예롭게 예우 받았어요.
어린이들은 신성이 파견한 새로운 사자들로 여겨졌고, 우리 사회에서처럼 속이 텅 빈 그릇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어요.
레무리아인들은 자기 자식들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들이 제대로 된 인간으로 기능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양의 헛소리를 자식들에게 주입하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들은 어린이들을 자기들 이미지를 그대로 베낀 조그만 복제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임금노예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그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어린이들을 보호했고, 그들 원래의모습인 빛의 아이들로서 그들을 키웠고,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배우듯이, 어린이들로부터 배웠어요.
그것은 아름답고, 공평하고, 영적으로 우아한 관계였죠.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어린이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질 못해요.
우리는 그들을 실내에 가둬놓고, 복종과 순종을 가르치고, 그들의 영적연결성을 약화시키고, 그들의 자아를 파괴하지요.
그들 스스로의 깊은 영적 필요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신, 남이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직장이나 경력 또는 다른 형태의 노예제도에 그들이 편입되기를 우린 바래요.
우린 그들을 비틀고, 으깨고, 그러고 나서는 그들이 사람 됐다고 하죠. 이건 끔찍한 농담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이 어른이 될 무렵에 이르면 그들은 영적으로 완전히 단절되어서, 원래 자기 자아의 그림자 정도에 불과하게 되니까요.
그들은(우리는) 그 지경이 된 다음에야, 기형적인 관계들과 왜곡된 사회적 형식 속에서, 잃어버린 연결에 대한느낌을 되살리려고 발버둥 치느라 시간을 다 쓰죠.
 
 
우리들의 방식과 레무리아의 방식은 또 다른 차이가 있어요. 레무리아 사회에서, 원로(노인)들은 영예롭게 예우 받았어요.
그들은 그들이 땅과 영에 오랜 세월 동안 바친 봉사의 삶을 사는 동안 쌓아 올린 지혜의 화신으로 존경 받았어요.
레무리아인들은 이 행성에 있는 생명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고, 삶이란 여정의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지금 그러하듯이, (물리적 몸의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두려워하고, 그 종착역의 기미가 눈에 띄는 대로 감추려고 허둥거리는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종착역을 영예롭게 여기고, 장거리를 여행한 이들을 영예롭게 대접했어요.
두려움에 그들을 감추어 두려고 하지 않았고, 원로들이 마을에서 영예로운 예우를 받고 살면서, 마을에 공헌할 수 있는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방법들을 제공했어요.
진실로, 어린이들을 기르는 것은 우선적으로 원로들의 책임이었는데, 그건 오직 원로만이 어린 생명을 보살피는 영예와 책임을 감당할 수 있다고 신뢰받았기 때문이에요.
원로들은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내내, 생산적이고 가치 있는 사회의 일원으로 남아있었어요.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원로들을 감추어 놓죠. 그들은 노쇠하고, 비생산적인 존재라고 우리는 믿고, 그들이 평생 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짐짝처럼 취급해요.
집 안에 그들을 놓아두고서, 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건설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 삶에 그들이 줄지도 모를 지혜를 무시해버리죠.
우리는 공동 책임을 지는 대신, 몇몇 여인들의 등에 그들을 보살피는 책임을 떠넘겨 버려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생산적인 사업에서 일하는 생산적인 개인만이 가치가 있는 존재라고 우리가 배웠기 때문이에요.
늙은 육체는 젊은 육체만큼 에너지로 충만하지 않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보기에 쓸 만한 상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또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요.
우리에겐 제대로 된 영적 연결성이 없기 때문에, 죽음을 몸(우리 자아)의 종말이라고 밖엔 못 봐요. 원래는 아름다운 여행의 순간으로 여겨야 할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우린 죽음의 모든 징후를 감추어두려 하죠.
레무리아 사회는 노예제도(생산성)을 우리처럼 영예롭게 여기고 숭배하지 않았어요. 레무리아는 창의성과 자기표현이 최상의 목적으로 여겨진 아름답고 균형 잡힌 세상이었어요.
그들은 커피 타임은 단 15분이고 점심시간은 한 시간이라는 걸 배우느라 학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았죠. 그들은 권위를 숭배하는 걸 배우느라 오랜 세월을 보내지 않았어요.
 
 
그들은 지독한 예속 아래서 공장 조립라인이나 책상에 스스로를 묶어놓지 않았어요. 그 대신, 레무리아인들은 일자의 불꽃들 Sparks of The One 이 되어 자신의 연결성과 목적성을 존엄과 자부심과 영광스러움으로 표현하도록 배웠어요.
우리가 일을 이해하는 감각으로 보자면, 레무리아인들은 일을 전혀 하지 않았어요. 대신에 자신의 가슴이 신나하는 그런 일만을 하고 지냈죠. 어떤 이들에게 그것은 음악이었고, 다른 이들에겐 서비스였어요.
아무도 다른 이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고, 모두 독립적이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표현력을 지닌 존재들이었어요.
개인들 하나하나가 자기들이 존재하기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했죠.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삶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생존을 위한 투쟁)과는 달리, 부족함이 아니라 풍요로움이 신의 모든 창조물의 타고난 권리라는 것을 알고 가슴 깊이 이해하고 있었지요.
레무리아 사회에도 분쟁은 있었어요. 많은 부족들과 이민족 집단들이 있었고, 그들이 언제나 서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마찰은 항상 미미했고, 분쟁의 상대편 당사자는 영의 가족 중에 가치 있는 일원이라는 전제가 항상 있었어요.
레무리아 사람들은 <나는 또 하나의 당신>이라는 걸 이해하거든요.
그 결과, 분쟁은 다른 사람을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시작된 적이 없었고, 특히 다른 부족을 완전히 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분쟁이 시작된 적은 결코 없었어요.
단 한 명의 개인을 파멸시키는 것조차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건 마치 자기 손을 자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지요.
 
에스파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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